피부 위의 착시                                                                                                                                                                                             
예술공간 의식주 박소호
제목_없음-10.jpg# 오늘을 여는 손
0과 1만으로 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지금의 디지털 시대는 손 끝의 감각을 무뎌지게 했다.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서로의 체온과 감각을 공유하지 않은 채, 단단한 유리를 통해 가상의 사물을 수집하고 퍼트린다. 펜과 종이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건과 사고가 공유된다. 그만큼 봐야 하는 세계와 공간은 저만치 멀어지고 눈앞의 정보와 이미지에 현혹되고 소비된다. 우리의 손은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와 유사한 망각의 문을 스스로 열게 되었다. 보편적이고 익숙한, 너무나 당연하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왔던 촉감의 끈이 뒤집고 전복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늘의 눈은 사물 고유의 질량과 밀도보다 가볍게 휘발되는 부피의 표면, 즉 이미지라는 껍질에 더욱 주목한다. 직접 다지고 쌓아 올린 깊이의 공간과 멀어지면서 서로의 거리도 점차 벌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육성조차 부담스러워 손끝에서 발화되는 짧고 간결한 기호에 더욱 안도한다.
 
# 피부로 돋아나는 것들
피부는 온도와 밀착을 통해 외부와 관계를 맺는다. 작가 이상덕은 피부를 감싸고 있는 0과 1의 껍질을 벗겨내어 단단한 유리막으로 가려진 우리의 눈에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제안하고 소개한다. 그는 화면에서 착시를 의도적으로 설계하여 상상과 망각, 안정과 불안의 공간을 동시에 새겨 넣었다. 사물에 대한 인지가 줄어들고 가상의 이미지와 텅 비어 있는 이야기가 난무하는 캄캄한 방에 날카로운 선과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창을 만들어낸다. 이는 시각의 전환을 위한 통로인 동시에 우리에게 던지는 밀도와 부피에 관한 질문이다. 오늘의 눈은 수많은 정보의 오류와 쾌락을 위한 소비로 유입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시각과 시선은 점차 납작하고 얇아질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된다. 앞과 뒤, 아래와 위,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분명한 경계가 만들어지면서 밤과 낮, 내일과 어제, 안과 밖이 교차하는 미세하고 세밀한 통찰의 영역을 잃어버리고 있다. 동시에 사물에 잠재되어 있는 여러 가능성과 확장의 통로가 좁아지고 있다. 우리의 피부는 더 이상 깊이를 감지하지 못한다. 이 두꺼운 피부 위의 봉인을 풀어내기위해 작가 이상덕은 닫혀있는 공간의 두텁고 넓은 장막을 한 겹씩 걷어내어 시공간의 전방위를 넘나들 수 있는 창을 만들어낸다.
# 착시로부터
어쩌면 디지털 공간뿐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 또한 실재하는 사물의 다른 면일 수 있다. 우리가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다섯 가지 감각 안에서 존재하며, 시간 한계 안에 있는 일정한 좌표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덕은 모든 것이 착시와 망각일 수 있는 이 세계의 속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콜라주를 활용하여 종이의 두께와 깊이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회화의 재현효과를 활용해 가상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종이와 종이의 경계, 선과 선의 깊이, 장면과 장면의 간극을 허물어 서로의 영역을 교차하게 한다. 관객은 작가가 만든 착시의 평면에서 사물인 것과 사물적인 것이 만나는 평면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때 관객의 시선은 빛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림자에 머물게 된다. 사물과 그림자, 그리고 빛의 경계가 분명한 동시에 흐려지는 교차의 풍경에서 관객의 시선은 해답을 찾기 위해 화면 곳곳을 누빈다. 그리고 실재에 대한 질문과 의문을 시작으로 아래로 지탱하는 뿌리와 위로 뻗어 나는 가지의 구분점이 마모된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이내 한 곳을 향해 흘러가는 파노라마 구성을 지닌 프레임 속에서 중력을 해방하고 앞으로 가는 시간의 속성을 뒤집는 공간의 열쇠를 찾을 수 있게 된다.
 
# 장막을 걷는 손
무한과 한계는 결국 같은 지점을 두고 교차하며 우리가 의지로 선택 가능한 항목일 뿐이다. 이상덕 작가는 유토피아와 이상적인 공간을 찾기 위해 착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편리와 효율을 위해 달려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세계가 만들어낸 망각의 허물을 벗겨내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상덕의 만들어낸 화면을 착각과 착오를 목적으로 하는 착시의 화면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봉인한 통감각의 실체를 깨우게 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앞으로 흐르는 시간이 아닌, 그 자리에 새겨진 통찰 할 수 있는 공간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상덕은 우리 자신에게 새겨 놓은 이름과 더불어 외부세계, 저 너머의 공간에 닿을 수 있는 이정표를 만들어낸다. 이는 ‘앞으로’, ‘내일’, ‘언젠가’처럼 미래만을 위한 기준과 안내가 아니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장소와 시간을 모두 통합하여 ‘지금, 여기’에서 그려낼 수 있는 광활한 감각의 경치를 일깨우기 위함이다. 많은 이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작가 이상덕은 오늘도 자신의 예민한 손으로 날카롭고 부드러운 풍경의 껍질을 벗겨 내고 있다.





되살아나는 것들                                                                                                                                                    



이중인격과 다중주체, 현실과 이상의 분열                                                                                                                                                     
미술평론가 고충환
종이인형. 지금은 보기가 어렵지만, 옛날에 종이인형이 있었다. 종이 위에 인형을 비롯한 각종 유니폼과 물품들이 프린트돼 있었고, 그렇게 프린트된 이미지 그대로 오려서 인형놀이를 놀게 한 것이다. 인형에게 어떤 유니폼을 입히는지에 따라서 인형은 학생이 되었다가 사무원이 되기도 하고, 발레리나가 되었다가 스튜디어스가 되기도 한다. 인형으로 대리되는 한 인격체 속에 잠재된 사회적 주체의 지점들을 발굴하고 덧입히는, 연출하고 실현하게 해주는 인형놀이는 어쩌면 유아들로 하여금 어른들의 놀이 즉 반복적인 일상과 하이어라키로 구조화된 사회적 현실을 예비적으로 체험케 한 일종의 역할극이며, 사회놀이 혹은 주체놀이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인형으로 하여금 자유자재한 변신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니폼은 사회적 규범을 상징하며, 그 사회적 규범을 덧입고서야 비로소 인간은 사회적 주체로서 거듭날 수가 있음을 시사한다. 마치 제도가 개인을 이데올로기적 주체로서 호명한다는 루이 알튀세의 전언에서처럼. 그러므로 인형의 자유자재한 변신은 이런 사회적 규범의 틀 속에서의 변신에 지나지가 않으며, 단지 자유자재하게 보일 뿐 사실은 자유자재하지가 않은 변신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처럼 자유롭게 보일 뿐 사실은 억압된 삶을 사는 인형들이며, 제도에 의해 양육되는 꼭두각시들일지도 모른다. 이상덕의 그림은 이런 종이인형을, 인형놀이를 떠올려준다. 아마도 그 처음 착상을 이렇듯 가상놀이로부터 얻어왔을 것이며, 그 가상놀이가 최소한 무의식적인 실마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전개도 인간. 인형놀이에서 유니폼이 사회적 규범과 틀을 상징한다면, 전개도 인간에서는 전개도가 그 역할을 도맡는다. 모눈종이(사실은 일종의 판법을 이용해 화면 위에 모눈종이 그대로를 재현한 것으로서, 이후 근작에서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된다)를 바탕으로 그 위에 전개도 형식의 인간형상이 재현돼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같이 전개도 속에 갇혀있다. 그리고 그들은 < 출근시켜주세요 >라거나 < 퇴근시켜주세요 >라고 호소한다. 이 호소는 마치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니, 전개도 그대로 오려내 조립해 달라는 호소처럼 들리고, 오롯한 형상으로 복원해 달라는 호소처럼 들린다. 모르긴 해도 그렇게 타의에 의해서 조립되고 복원된 연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출근할 수도, 퇴근할 수도,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게 될 터이다. 논리적으로 전개도 인간은 전개도를 조립하기에 따라서 다양한 정체성을 실현할 수가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미리 주어지거나 전제된 한정된 정체성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마치 자유자재한 것처럼 보이는 인형의 변신이 알고 보면 다만 사회적 규범을 의미하는 유니폼을 갈아입는 행위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이처럼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무기력한 개인이나, 전개도로 상징되는 제도에 의해 주어진 특정의 정체성만을 수행할 수가 있을 뿐인 수동적인 개인이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에 대한 미셀 푸코의 전언을 떠올려준다. 즉 옛날에 제도는 개인의 몸을 직접 억압하는 방식(이를테면 감금이나 고문이나 추방과 같은)으로 개별주체를 감시했었다. 그리고 이후 점차 삶의 환경이 문명화되면서 그 역할을 교육이 떠안는다. 즉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교육시키고 내재화한 것인데, 그렇게 내재화된 연후에는 더 이상 제도가 개별주체를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 개별주체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개도로 상징되는 규범화된 인간이나 틀화된 인간은 처음에는 제도가 그렇게 한 것이지만, 점차 개별주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규범에 맞추고 틀에 맞춰나간 나머지 마침내 꼼짝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전개도 인간 시리즈 작업은 이렇듯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억압적인 관계에 대한 작가의 주제의식을 반영한다. 이중인격과 다중인간, 분절되고 해체되는 나. 종이인형이나 전개도 인간은 하나같이 제도에 의해 주어진 정체성을 자기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대리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페르소나 곧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주체에 해당한다. 이렇듯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주체가 진정한 주체일 수는 없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로 정의한다. 욕망이 진정한 주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필연적으로 제도에 의해 억압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 개별주체가 욕망 대신 제도에게 내어준 주체가 바로 페르소나다. 결국 인간은 진정한 주체인 욕망을 숨기면서 외형상으론 페르소나로 대리되는 삶을 사는 이중적 존재며 자기 분열적 존재다. 자크 라캉이 인간의 존재를 결여와 결핍에서 찾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비극은 이처럼 실현 불가능한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충동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온다. 어쩌면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과 그 욕망을 억압하려는 개별주체와 제도와의 각축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개별주체 내부적으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하는 한 이중인격과 다중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post_human_장지에_아크릴.커팅_.콜라주_.90x112cm_.2011_복사_.jpg삶에는 이처럼 행과 불행이 있고, 빛과 그림자가 교차된다. 그리고 대개 현실은 이상(욕망)과는 동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근작에서 이런 삶의 이중성을, 존재의 이중분열을 주제화한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중으로 중첩돼 있다. 그 중 한 벌은 작가 자신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을 그린 것이고, 나머지 한 벌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각종 신이나 반신들이다. 여기서 보통사람들은 현실을 상징하고, 신이나 반신들은 이상을 암시한다. 그 현실과 이상 모두 사실은 나에게서 분기된 것들이다. 즉 나의 몸은 비록 현실에 속해져 있지만, 그 순간에조차 나의 의식만큼은 이상을 지향한다(욕망을 좇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여기에 없다거나,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있지 않다고 라캉은 말한다.
부연하면, 그림에서 소녀는 사랑의 신인 큐피드와 겹쳐있다. 나는 에로스로도 부르는 큐피드처럼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큐피드의 날개는 결코 나의 날개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보통 몸매의 보통여자 위로 미의 화신인 비너스가 중첩돼 있다. 나는 비너스처럼 아름답고 싶지만 그녀의 미는 결코 나의 미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가하면 좌절한 남자(혹 생각하는 사람?) 위로 승리의 신인 니케가 포개진다. 낙심천만한 현실과 개선장군과도 같은 이상이 충돌하고, 기세등등한 욕망이 현실원칙에 부닥쳐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나간다. 니케의 날개는 부러진 후에라야 비로소 나의 것이 될 수가 있을 터이다. 그리고 보통남자가 때로는 삼지창을 든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리고 더러는 손에 리라(수금 혹은 하프)를 들고 연주하는 태양신 아폴로의 초상과 겹친다. 그 신들의 전지전능함, 그 권력은 나의 것일 수가 있을까. 나는 권력을 꿈꾸지만, 그 권력은 다만 꿈일 뿐. 그 뿐.
욕망은 트라우마의 원인이기도 하다. 욕망이 없으면 좌절도 없고, 추락도 없고, 상처도 없다. 그렇다고 욕망을 멈출 수도 없는 일이다. 욕망은 나의 본능이며 본성이므로. 욕망은 결국 현실원칙으로부터 일탈하고 싶은 것이고, 그 욕망은 현실원칙에 부닥쳐 산산조각난다. 그 욕망은 이처럼, 어쩌면 근본적으로 억압된 욕망이기에, 추락을 피할 수 없는 욕망이기에 그렇게 추락된 욕망이 무의식의 층위로 숨어들고, 그 실체도 덩달아 모호해진다. 그래서 그림에서 욕망(이상)은 그 실체가 모호한 것으로 나타나고, 현실원칙에 부닥쳐 파열되는 것으로서 현상한다. 욕망의 모호한 실체와 현실원칙의 무자비한 처벌이 부닥치고 충돌하는 것.
작가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 자체로는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는 사건을 형상화하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외관상 여러 이질적인 기법과 방법들을 혼용하고 혼성한다. 즉 앞서 말했듯 작가는 보통사람들의 초상과 신화적인 캐릭터, 이렇게 두벌의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이렇게 그려진 그림을 부분적으로 오려낸 후, 재차 화면 위에 올려붙이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두 벌의 다른 그림을 하나의 화면 속에다 중첩시킨다. 일종의 콜라주가, 엄밀하게는 파피에콜레 기법이 적용되고 있는 것인데, 그 방법이 입체파와의 일정한 영향관계를 떠올리게 하고, 실제로도 분열되고 해체되고 재편집된 입체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입체파는 형태를 해체한 연후에 그 파편화된 조각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원래의 형태를 복원하는데, 이는 마치 세계를 해체해 재구성하는 세계건축 프로젝트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포스트휴먼이라고 명명한다. 신인류가 될 터인데, 필자에게 그것은 정작 신생인류로서보다는 현생인류(사실은 현생인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들린다. 종이인형과 전개도 인간으로 대리되는 페르소나에 가려 억압된 주체를 복원하려는 프로젝트처럼 보이고, 현실원칙에 부닥쳐 산산 조각난 선남선녀들의 이상과 욕망, 자기소외와 상처의식의 표상처럼 보인다. 비루하고 잔인하고 가차 없는 현실원칙 뒤로 미소를 흘려보내는 이상과 욕망의 그림자처럼도 보인다. 이로써 작가는 어쩌면 라캉의 말처럼 말 뒤쪽의 침묵이 하는 말을, 의식 뒤편의 무의식이 하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저마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말을 들을 수가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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